꿈과 교육은 어울리지 않는 궁합 같다.
사람들과 그룹으로 꿈나누기를 해온지 7년인데, 단 한 번도 교육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처음 한 시민사회단체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꿈모임을 시작했을 때, 그룹 대다수가 뜨악해 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우리가 꿈하고 무슨 상관이야?’ 오히려 나는 단체의 그런 반응이 황당했다.
‘참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구나! 사람들이 얼마나 하고 싶어 하는 모임인데 ……’
시민들에게 꿈은 언제나 인기 강좌이다.
그런데 단체 운영자들의 이해도는 여전히 낮다.
이 거리감이 뭘까?
지금 ‘교육’이란 말이 내게 낯설게 다가오듯 꿈모임 자체가 시민교육을 주도하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치었을지 모르겠다.
단체들과 내가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지?
아니면 꿈이란 주제가 근엄한 단체 사람들에게 너무 생뚱맞는지?
그도 저도 아니면 꿈모임의 접근 방식이 기존 교육과 너무 달라서일까?
아마 이 모두 다인지 모르겠다.
시민교육에 대해 왈가왈부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왜 나는 꿈을 택했는지?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꿈을 다루는 방식에서,
집단의 의식을 고양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나 통찰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꿈에 대한 흔히 하는 오해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찰해볼 거리들이 노출되길 바란다.
2010년 정동 품사랑에서 진행되는 꿈모임
개꿈은 없다, 나쁜 꿈도 없다
나에게 교육은 사람들이 각자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자원들을 발굴하고 일깨워 의식화된 행동으로 표출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안’에 초점을 맞추고 내면세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선각자들이 ‘안으로부터의 혁명’을 이야기하는데,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안’을 어떻게 다룬다는 말일까?
이런 반문을 하는 동안 내가 만난 방식 하나가 꿈작업이다.
꿈은 잠만 자면 꾼다.
꿈을 안 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실험실에서 연구한 결과들은, 사람은 누구나 하룻밤에 5번에서 7번 사이의 꿈을 꾼다는 것이다.
꿈을 안 꾼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꿈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기억하든 못하든 비슷한 숫자의 꿈을 매일 밤 꾸면서 산다.
그런데 이 꿈이 의미들로 가득하고 누구나 꿈 자체가 방향성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분야 전공자를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아니다.
흔히 말하는 ‘개꿈은 없다.’
꿈이 황당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꿈의 언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흔히 모르는 외국어가 그렇듯, 의미가 없이 들릴 뿐이다.
다른 언어를 배우듯 꿈언어를 익혀 가면 의미 없는 꿈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한마디로 꿈은 ‘의미의 보물창고’이다.
영혼의 상태를 거울처럼 비추어 주는 것이 꿈인데,
그 안에는 어린 시절 잊었던 기억도 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패턴도 드러나고,
삶의 태도와 감정 상태도 명료하게 비추어 준다.
또 수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잠재력과 창조적인 끼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나쁜 꿈도 없다.
꿈은 언제나 꿈꾼 사람의 성장과 건강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좋은 꿈’, ‘나쁜 꿈’이란 말은 성립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꿈을 나쁜 꿈이라 간주하느냐 물어보면 대다수는 악몽을 든다.
그러나 악몽은 시급한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제발 잠만 자지 말고 깨어나! 지금 너의 본성에 반하는 길을 가고 있어. 이 상황은 너에게 치명적이야.”
라고 무의식이 SOS를 보내는 것이다.
어서 깨어나라는 꿈의 호소
최근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30여 년 사목활동을 하신 신부님의 악몽을 들었다.
게릴라의 총에 맞아 전사한 남자 시신에 성호를 그으려고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총에 맞았던 팔이 뚝 떨어져서 혼비백산을 하면서 깬다.
이 꿈은 실제 상황이 꿈에 재현된 것이다.
신부님이 민다나오에서 티볼리 족과 함께 살던 초기에 일어났던 사건인데,
그 때부터 밤마다 되풀이해서 이 악몽이 나타났다.
이 꿈은 5년 간 계속되었다.
민다나오는 지금도 세상에서 제일 오지 중 한 곳이다.
위험은 단지 척박한 환경만이 아니다.
반군이 출몰해 시민들을 잡아가고 정부군이 반격하고 그 와중에 희생과 살해가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 신부님을 제일 힘들게 한 것은 태어나는 아이 둘 중 하나는 죽어가는 높은 사망률이었다.
이런 열악한 터전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도 믿음도 흔들렸다.
깊은 우울이 지속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픔이란 팔 하나가 떨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손과 팔은 뭔가를 할 수 있는 창의적인 활동과 연관이 된다는 점에서,
“하느님,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어요?”라는 깊은 탄식과 좌절감을 나타내는 창조적인 활동에 대한 상처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예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창조적인 전환이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어서 깨어나라는 게 꿈이 하는 호소이다.
꿈의 메시지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결심한 순간 이 오랜 악몽은 사라졌다고 했다.
지금 이 분은 인간의 손길이 가장 덜 닿은 처녀지 민다나오에서 배운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전하고 계신다.
숲은 그들의 슈퍼이자 약국이고 성당이자 음악이라는 티볼리의 가치관과,
숲을 땔감과 돈으로만 보는 숲의 파괴자들의 극명한 가치를 글로 쓰고 강연을 하신다.
‘투사 꿈작업’의 모태는 시민운동
꿈과의 대화를 시작하면 경이로운 세상 하나가 더 열린다.
깨어있는 동안 눈은 밖을 향해 열려 있어서 내면을 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잠을 자는 동안에 감은 눈은 안을 향해 열려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이 세계는, 최소한 나에게는, 바깥세상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엉뚱하고 기발하고 발랄한 상상의 잔치가 밤마다 펼쳐진다.
그런데 이런 풍부하고 다양한 꿈 세계가 시민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떨어져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몽환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흔히 꿈을 현실 도피의 수단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꿈에 대한 이해도 꿈 해몽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꾀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아편’ 같이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순전히 오해이고 편견이다.
맨 처음 그룹 ‘투사 꿈작업 (group projective dreamwork)’을 고안한 분은 제레미 테일러 박사인데, 이 작업의 모태는 시민운동이다. 1960년 초반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모임을 시작했는데,
구성원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지니는 편견을 철폐하고 평등이란 이상을 실현하려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룹은 목청만 높이는 진부한 단체로 변해갔고, 모임은 지리멸렬해졌다.
구성원들은 추구하는 숭고한 이상만큼 창의적이지도 열려 있지도 않았다.
이런 시점, 엉뚱하게도 제레미가 “꿈을 한 번 다루어 보자.”는 제안을 하였다.
각자의 꿈속에 등장하는 흑인의 모습들에 초점을 맞추어 성찰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구성원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각자 자신들이 얼마나 인종차별주의자인가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기 안의 무의식적인 태도와 두려움을 직시하지 않고 구호로 외치는 이들의 메시지는
관념으로 머물고 주장은 호소력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변화는 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이들의 깨달음과 자기 안의 편견 철폐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전환은 혁명적이었다.
이렇게 꿈을 통해 들여다 보면 자신의 사고나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무의식까지 성찰하게 된다.
대다수 사람에게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추상이다.
하지만 꿈에 밤길을 걷다가 흑인을 만나자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하고 서둘러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내면세계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편견을 인식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몸 - 체험으로 다가온다.
우이동 명상의 집 - 꿈처럼 모임 자리도 아름답게
‘해야 한다’가 ‘하고 싶다’로 - 정서적 성숙
개인적으로 교육이란 표현이 거북한 이유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웠던 많은 내용들이 머리에 입력·저장되었지,
내 안에서 충분히 발효가 되어 행동의 변화로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교육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았을까?
시민교육이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되풀이 한다면, 조만간 ‘살아있는 시민교육’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닐지?
아름다운 아이디어나 이상이 개개인의 몸과 삶 전체로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가슴으로 내려오려면 정서와 감정이 움직여야 한다.
산 교육 혹은 좋은 교육은 정보의 전달이나 습득이 아니라 감동으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감동이란 기쁨과 환희 같이 긍정적인 면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깊은 슬픔과 아픔 또 절망감, 외로움 등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한다.
함께 울고 웃는 사이 감정의 물기가 흘러 개인의 경계를 넘어 가슴과 가슴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람들 내면의 깊은 언어들을 들으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이슈 하나는 감정 정서의 미발달, 미성숙이라는 점을 절감한다.
심리 작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해야 한다(should)’가 ‘하고 싶다(want)’로 바뀌는 시점이 정서적 성숙의 한 단계 도약을 의미하는 척도로 간주한다.
집단의 준거를 따르는 삶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어 행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전화를 한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른다.
그런데 A가(예전 파트너) 전화를 받는다.
B선생(A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데 A가 불같이 화를 낸다.
지나간 이야기 왜 또 꺼내냐고. 절망스러웠고 배신당한 느낌이었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A에게 차분히 이야기한다.
B에 대한 너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아프다는 걸 이해 좀 해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A가 화를 누그러뜨린다.
꿈에 느낌, 감정, 정서란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
꿈꾼 이와 A는 7년 간 함께 살았다.
A가 B라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자 배신감을 느끼고 대화를 시도하지만 상대가 부인만 하자 답답해서 술을 마시게 되고 …….
한 사람은 ‘술 문제’로, 다른 사람은 ‘부정과 배신 때문에’라고 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이별의 아픔을 시리게 겪는 와중에 꿈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처음 이 사람의 언어는 A가 그러면 안 되고, B는 어떻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그랬어야지요.’ should뿐이었다.
머리로 하는 판단과 자기 판단을 주입하는 것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본인이 뭘 느끼는지 물으면 전혀 대답을 못했다.
서서히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감정의 결들을 알아가고 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감정 정서가 진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이 꿈에 그대로 드러난다.
꿈에 꿈꾼이는 성숙한 소통을 하고 있다.
파트너에게 “B에게 끌릴 수 있어. 그렇지만 이 순간 나는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가 일어. 내 아픔을 좀 봐 줘.”
머리로 하는 표현이 아니라 가슴 언어이다.
그리고 자기를 표현할 때 나라는 일인칭 대화를 한다.
비폭력대화의 기본이기도 하다.
그러자 상대의 화가 누그러진다.
당위 ‘should’를 내세우는 사람과의 대화는 종종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갈등은 대개 상대가 뭘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심정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감정을 존중하고 깊이 공감을 하면서 행동의 변화가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사람이 파트너와 헤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술로 문제를 풀려하지 않는다.
“혼자인데 술 마실 기회도 많고 술 마시는 걸 뭐라 그럴 사람도 없을텐데 ……” 하자,
“감정 정서를 스스로 알고 설명을 하자, 술 마실 이유가 사라졌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의 술 문제가 얼마만큼 이런 경우인지? 답답한데 뭔지는 모르겠고, 술 먹으면 느슨해지고 그러면서 폭발을 하고.
꿈을 영혼의 거울이라 했다.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면 깊은 차원에서의 만남이 가능하다.
누구나 꿈꾸는 관계인 영혼적 깊이를 서로 공유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상대에게 ‘왜?’가 아니라 ‘아 그렇구나!’라는 이해와 수용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깊은 차원에서 만나는 공감과 나눔이 바탕이 되어 결속력이 강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창의적이고 건강한 공동체 조직을 위해서도 구성원들 간의 꿈작업을 추천하고 싶다.
제레미가 1960년대에 시작했던 그 인종차별 철폐 그룹은 아직 지속된다고 하다.
이런 성공적인 그룹의 숨은 비결은 비전을 공유할 뿐 아니라,
비전을 공유하고 실현하려는 사람들 개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함께 꾀하기 때문이다.
시민교육의 품과 폭이 넓어졌으면
그동안 꿈을 통해 참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정서적인 상처들, 이 사회에 놀랄 만치 많은 성폭행,
깊은 우울과 감당 안 되는 분노, 시기, 질투, 절망, 폭력성, …….
집단의 편협, 위선, 어리석음과 잔혹함도 만났다.
여성, 성직자, 활동가들, 성적 소수자들, 광주의 아픔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났다.
한 겹 벗고 속내를 드러내는 작업들이라 가슴 절절 아프기도 하지만, 진솔해서 감동적이다.
제레미의 인종차별 철폐운동은 각자 자기 내면에 있는 인종차별적 성향을 인식하게 되면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성숙하고 책임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우리 본성 중에 미개발되고 장애로 남아 있는 부분과 친숙해지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사회에 드러나는 편견과 폭력은 언제나 그 뿌리에 우리 내면의 편협함이나 무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민교육의 품과 폭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내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현실 문제의 부정이나 도피가 아니라
더욱 확장된 의식으로 책임 있고 성숙한 시민이 되는 ‘지름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과 밖, 머리와 가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류 문화의 반대쪽을 강조하기 위해 바깥보다는 안을 그리고 머리 보다는 가슴에 방점을 찍는다.
시민교육은 학교교육과 내용뿐 아니라 방식도 달랐으면 한다.
나의 꿈은 많은 사람들이 반상회를 하듯 꿈그룹을 만들어 꿈을 나누었으면 한다.
그 단위가 가족이든 집단이든 시민사회이든 꿈하고 친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
성숙한 개인들이 모여 집단의 의식이 고양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