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깨달음. 왠지 가깝고도 먼 것 같다.
앎은 서울 한복판 어느 강의실에 있을 것 같고, 깨달음은 지리산 어느 적막한 암자에 있을 것 같다.
그런 거리감은 왜 생긴 것일까.
법정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 이승에서의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일체의 저작 출판을 내려놓고 가셨다.
앎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도 삶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단지 앎의 단계를 넘어가야 한다.
‘어떻게 넘을 것인가?’ 이런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도법 스님을 서울시 신정동에 있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실에서 만났다.
교육은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교육이 반드시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람과 만나야 한다.
교육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연(緣)일 수도 있고 사람과 세상 사이에 통하는 길일 수도 있다.
도법 스님은 2004년 3월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지리산 노고단에서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해 2008년 12월 회향했다.
5년 동안 3만 리를 걸어서 8만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첫 질문을 ‘길’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배움이란 삶과 세상을 깨닫는 것
“스님께서 걸으시면서 얻은 깨달음 중에서 시민교육 활동가들에게 주실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왜 걸으셨습니까?”
“인간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고, 걸으면서 살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렇게 살아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인간 존재로 제대로 산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것은 자기 존재를 가장 온전하게 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걸음을 잃어버리고 기계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걷기라 …….
인간의 삶도 그런 것일까.
이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가기로 했다.
“그 말씀은 걷는다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하나의 양식이라고 해석되는데요, 그렇다면 사람에게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잘 모르니까 배우는 거 아닌가요?
모른다는 것은 봉사란 뜻이죠.
봉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움직이면 여기저기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이 생기게 되겠죠.
그런데 눈을 뜨게 되면 방향을 잘 찾아서 갈 것이고, 길을 잃거나 헤매거나 장애물과 충돌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이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결국 배움이란 삶과 세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배움이란 길을 찾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님께서 던지신 화두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입니다.
보통 우리는 변화하고 발전하면 좋은 세상, 그리고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와 발전의 극점에 도달한 오늘의 현실은 과연 좋은 세상이며, 사람들은 행복한가요?”
이 말씀에 대해서 누가 자신 있게 “나는 행복하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살아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경제적으로 수백 배의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백 년 전에는 지리산에서 서울에 온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학혁명 때 농민들의 주된 요구사항 중의 하나는 과부가 재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이렇게 더 풍족해지고 편리해지고 인권신장을 이룩했지만,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행복한가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가면 되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스님은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가르쳤는가에 대한 반성을 세 가지로 짚으셨다.
“첫째, 자연생태적 재앙으로 인해서 인류문명이 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둘째, 그렇게 발전하면 모순이 줄어들어야 할 텐데 사회적 양극화가 한국사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셋째, 변화하고 발전할수록 삶이 더 여유롭고 만족스러워야 할 텐데 사람들은 오히려 불안,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평화롭고 따뜻하기는커녕 극단적인 경쟁관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늘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화하고 발전하면 행복해지고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와 신념은 잘못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생각과 지식이 아닌 삶을 얘기해야
스님 말씀대로 하자면 지금은 “그동안의 배움과 가르침은 어디가 잘못된 거야?”라는 반성과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지?”라는 질문이 필요한 시기다.
즉, 앞만 보고 무턱대고 가르치고 배울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을 깬다는 뜻이 된다.
이 대목에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깨다’는 ‘생각이나 지혜 따위가 사리를 가릴 수 있게 되다.’, ‘단단한 물체를 쳐서 조각이 나게 하다.’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흔들어야 한다.
결국 깨지 않으면 깨우칠 수 없다.
그렇다. 시민교육은 흔들어 깨워, 깨우침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시민교육 활동가들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시민교육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드렸다.
“대중들은 생명, 생태적 가치, 평화,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합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옳은 얘기이니까요.
하지만 돌아서면 달라집니다.
시민들에게는 당장 아이가 학원에 잘 갔는지, 경쟁력 있는 아이로 커서 일류대학에 갈 수 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로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먼저 시민교육 하는 사람들은 뭘 가르치고 뭘 배울 것인지 방향과 길을 명확히 하고 가는 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살아본 내용으로 배우게 해야 합니다.
생각과 지식이 아니라 삶을 얘기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좋다면, 말 이전에 그것이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납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이 평화와 만족을 얘기하면 듣는 사람도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따로와 함께, 균형과 조화 필요
이 대목에서 진보는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진보는 왜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스님은 진보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은 빼앗음과 빼앗김, 죽임과 죽음, 지배와 피재배, 극단적인 경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즉, 세상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왼손과 오른손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몸의 두 손입니다.
진보와 보수도 이처럼 왼손과 오른손 같은 겁니다.
서로 동반자 관계입니다.
개인 중심의 자본주의, 전체 논리 중심의 사회주의는 한 몸의 오른손과 왼손의 관계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 왼손 등에 종기가 났다면 왼손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로와 함께, 개별과 전체는 늘 그물코처럼 상호의존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더불어 함께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따로와 함께, 개별과 전체,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불의가 없는 정의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런 세계관의 문제를 재정립하지 않고는 그동안 범해왔던 오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뷰는 점점 본질적인 문제로 향하고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깨달음은 이론적으로 말할 수도 있고 체험으로 말할 수도 있겠죠.
더 중요한 것은 삶에서 체험된 것입니다.
가령, 여기에 거룩한 부처님, 밥, 똥이 있다고 합시다.
부처님은 거룩하니까 가까이 가고 싶고, 밥은 그냥 그렇게 심드렁한 것이고, 똥은 더럽고 몹쓸 것이니까 멀리 하고 싶겠죠.
그런데 구체적인 실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밥이 없는 부처가 있을 수 있을까요.
거룩한 부처를 존재하게 하는 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똥이 없는 밥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농경사회에서는 자기 똥 3년만 안 먹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놈이 한 놈도 없다고 했습니다.
똥은 거룩한 밥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입니다.
마찬가지로 똥도 거룩합니다.
그런데 똥이 스스로 존재하나요.
밥을 먹어야 똥이 생깁니다.
이 세 가지는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관념과 달리 존재 그 자체는 모두 거룩
우리의 관념과 달리 존재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입니다.
존재 그 자체로 보면 모두 거룩합니다.
이러한 실상을 깨친다면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 새벽부터 목욕재개하고 발을 동동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똥을 없애버리려고 얼굴을 찌푸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체험적으로 터득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상(實相)’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은 무엇일까.
스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유연하게 설명해 주셨다.
“이론적인 이해나 실천적인 궁리를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산유곡에 들어가 정신집중과 직관적인 방식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스님은 하나의 방법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핵심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심산유곡에나 있을 법한 깨달음과 생활 민주주의가 만나는 지점 아닐까.
생각이나 말로만 배우다 보니 부처는 거룩하고 똥은 더럽게 느껴진다.
가치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실상을 보면 모든 존재는 거룩하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와도 통한다.
또 하나의 절실한 질문이 떠올랐다.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르치려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입니다.”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움이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배우지 않고 가르친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겁니다.”
단호하다.
스님의 말씀은 차분하지만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하는 힘이 녹아있다.
이것은 실제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이 시민들과 만나면서 무수히 범하는 잘못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를 더 듣기로 했다.
진실에서 해답을 찾아야
“지금 한국사회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운동 내부도 노선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있어서 어디에 중심을 두어야 할까요?”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편이냐 내 편이냐,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진실이 무엇이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승부가 결론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은 아닙니다.
승부로 해답을 찾으면 이기는 사람은 좋겠지만 진 사람은 승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익을 보지만, 누군가는 손해를 봅니다.”
이쯤 되면 조금 민감해진다.
세상사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칼로 쪼개듯 판단하기 어려운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절충이나 협상,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지 않겠습니까?”
“협상과 타협 이전에 진실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승부게임 이전에 진실이 앞서야 합니다.
가령 환경문제만 하더라도 인간은 개발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의 조건인 자연을 보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둘 다 진실입니다.
결국은 해답은 양자 간의 균형과 조화밖에 없습니다.”
진실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지점에서 싹쓸이식 경쟁이 횡행하는 현재의 삶의 방식에 대한 스님의 말씀이 궁금해졌다.
스님은 경쟁관계보다는 ‘긴장관계’라는 표현을 쓰셨다.
풀어서 말하자면 견제와 협력이다.
견제가 없으면 무력해지고, 협력이 없으면 파괴적으로 가게 된다.
스님은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과 질서라는 말씀도 덧붙여주셨다.
진보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놓칠 수 없다.
“진보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의식이 깨어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면 더 도덕적이고 깨어있는 사람들이 보다 성숙하고 현명한 태도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던 10년 동안 그렇게 했던가요.
지난 반세기 이상의 굴곡진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저지르는 것은 순간이고 일방적이지만, 수습하는 것은 순간에 되지 않고 우리 스스로도 노력해야 합니다.
순수는 생각에만 있는 겁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리로 부처님만 있고 똥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런데 그건 망상일 뿐입니다.”
다시 배움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사람이 변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현재 모든 문제는 정체성 상실에서 옵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절실한 문제는 바로 자신입니다.”
“그러면 소시민들이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 역시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겁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그
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벙어리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 대답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깨어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스스로에게는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늘 듣는 것이고, 밖으로는 진실, 즉 실상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방점을 찍었다.
내면의 소리, 그리고 밖의 실상을 보도록 안내하는 것이 이 시대의 시민교육이 짊어져야 할 역할 아닐까.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의 뿌리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인터뷰 내내 스님은 인터뷰어의 질문에 반문하는 식으로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해답은 바로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오랜 수행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도법 스님은 송월주 스님의 제자로 1990년 젊은 스님들의 수행단체인 ‘선우도량’을 만들면서 개혁불교의 선두에 섰습니다.
1998년 말 조계종 내분 때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분규를 마무리 짓고, 실상사로 내려와 생태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도법 스님은 지난 1949년 제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965년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서 출가했으며
1987년 금산사 부주지, 1995년 실상사 주지가 됐습니다.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